인도여행기
인도 여행기
여행기간 : 2004. 8. 11 - 8. 22
김 윤 하
8월 11일 수요일
마침내 11일간의 인도여행이 시작되었다.
전날 우리집에 모였던 2학년 6명과 공항에서 만난 1학년 2명 그리고 인솔하시는
황인랑샘까지 모두 9명이 화랑고등학교 인도 배낭여행단의 구성멤버였다.
인도에서 만나기로한 한국인 식당주인에게 전달해줄 물건들을 화물로 접수시킨뒤 배낭을 메고 인천공항 검색대를 통과하면서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와 설레임은 벌써 하늘을 나르는 기분이었다.
우리들이 탑승한 홍콩행 대한항공 비행기는 8시50분 굉음을 내며 힘차게 이륙했다.
서해바다의 모습이 평화스럽게 보였다. 기내식은 비빔밥을 선택했다.
고추장을 언제나 먹을까 하는 생각에....
배낭여행에 담요가 요긴하다는 말에 용기를 내어 비행기 모포도 챙겼다.
장당 1만원이나 하는 것을 배낭속에 숨긴 것이다.
양심이 찔린다. 대한항공을 많이타면 혹시 용서해주지 않을까???
델리행 AIR INDIA로 갈아타기 위해 홍콩 첵랍콕공항에서 4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발권전에는 면세점에도 못들어가 대기실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기다리던 인도항공 직원은 상당한 시간이 경과된 뒤에야 나타났다.
그러나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인도에 도착하기도 전에 인도란 그런 나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튼 1시간 가량은 면세점을 돌아다니며 눈요기를 할 수 있었는데 홍콩의 물가가
엄청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어 인디아- 마침내 인도 비행기에 탑승했다.
여기서부터는 힌두교의 나라 인도다.
훈조의 머리위 짐칸에서 술병이 깨져 술이 흘러내리는데도 스튜어디스는 바라보기만 했다. 내가 물을 먹으려고 불렀는데 30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찾아 갔더니 어이없게도 자기들끼리 잡담만 하고 있었다.
오랜지쥬스 한잔 먹기도 무척 힘들었다. 써비스정신이 엉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도는 한국시간보다 3시간 30분이 늦었다.
현지시간으로 밤 10시 도착했는데 델리공항에는 가이드를 약속한 샥티 아저씨가 우리들을기다리고 계셨다.
8월 12일 목요일
새벽 1시에 Decent Hotel에 들어가 방을 잡았다.
10시 도착해서 왜 다음날 1시에 방에 들어갔느냐???
샥티 아저씨가 호텔직원에게 선불 500루피를 지불했고 오전에 예약확인까지 했는데도 불구하고 엉뚱한 손님을 받은 것이었다. 허 이런일이.........
그래서 샥티 아저씨는 2시간 넘게 호텔 직원과 싸웠던 것이다.
그결과 선불금 500루피도 되돌려받고 숙박료도 면제받았다.
인도식 계산법이 흥미롭다. 아울러 샥티 아저씨 수완도 대단하다고 생각되었다
해가 밝아지면 또 어떤일이 전개될까.....인도에서의 본격적인 여행이 기대된다.
오전 8시 30분. 호텔앞 건물옥상에 있는 음식점에서 오리엔테이션을 가졌다.
며칠간 가이드해줄 샥티 아저씨는 바라나시에서 한국음식점 “라가카페”를 운영하시는 유학생 부부로 4년째 인도에 살고 있었다.
황인랑 선생님과 연결되어 우리들이 인도오는 길에 된장 고추장등 식당에서 필요한 부재료들을 구입하여 전달해 주었는데 답례로 샤티 아저씨는 공항에 픽업을 나왔고 호텔예약과 며칠간 차량까지 제공하며 우리들을 가이드해주실 예정이다.
황샘은 이번이 인도여행 3번째라고 하셨다.
지난 여행때는 6개월 동안 인도의 명상수련원에서 계셨다고 한다.
황샘의 경험이 바탕이 되어 우리들은 약간의 수고로 많은 비용을 절약할 수 있었으며 결국 비행기값에 불과한 비용으로 인도여행을 하게 된 것이 감사할 뿐이다.
아침은 인도의 전통음식인 탈리라는 백반이었다. 푸석거리는 쌀밥에 차파티,
파파드, 커드(요구르트), 싸부지, 샐러드 등이 식판에 나왔고 식사 전에는 짜이
라는 차를 마셨다. 짜이는 홍차에 우유와 설탕을 넣은 음료인데 인도인들은 아침
마다 짜이를 마시며 하루를 시작한다고 했다.
델리시내를 여행하기에 앞서 선생님께 주의사항을 전달받았다.
여권, 돈, 비행기표를 넣은 복대는 단단히 허리에 매었다.
가격은 무조건 깍아야하고 물건을 구입할때는 Last Price를 말하라고 알려 주셨다.
인도화폐 루피는 조금만 ��기거나 테이프를 붙여도 통용이 안된다고 했다.
2개조로 나누어 델리시내 자유여행이 시작되었다.
나는 상현이와 1학년인 현민, 원희 이렇게 4명이 같이 움직이기로 했다.
선생님에게 용돈을 받은뒤 과일과 물을 준비하여 작은 배낭을 메고 델리에서 볼거리가 많다는 꾸�源犬じ7� 갔다.
꾸�源犬じ?〈� 델리를 최초로 정복한 이슬람 세력에 의해 만들어진 승전탑이 있었는데 72미터의 거대한 규모였다.
승전탑 옆에는 모스크가 있는데 인도 각지에서 파괴된 힌두교사원의 잔여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곳은 휴마윤의 무덤과 함께 델리에서 가장 잘 보존된 유적지라고 했다.
그곳에서 망고도 먹고 물도 마시며 사진촬영을 하다보니 금새 인도에 익숙해졌다
운송수단인 릭샤를 타기위해 흥정하는 것도 재미있었고 눈앞에 전개되는 모든 풍경들이 흥미로웠다.
이제야 인도여행의 기분이 제대로 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8월 13일 금요일
기차를 타고 밤새 달려 바라나시에 도착하니 아침이다.
갠지스강이 눈앞에 내려다보이고 화장터의 연기가 풀풀 피어오르는 지역에 숙소를 정하고 배낭을 풀고 샤워까지 하니 날아갈 듯한 기분이다.
요즘 비가 많이와 강변길이 물에 잠겨 다니지 못해 쉬웠지만 북적대는 관광객과
성지를 찾은 순례객들로 바라나시는 활기에 넘쳐보였다.
바라나시에서는 원숭이를 조심하라는 샥티 아저씨의 말이 머릿속에 남는다.
그럴만도 한 것이 가는 곳마다 원숭이가 엄청 많았다.
바라나시가 도시인지 동물원인지 착각될 정도였다.
좁은 골목길에 소똥, 개똥이 사방에 널려있어 더러웠지만 사람들은 아무 불만 없이 편안한 모습들이었다.
경건한 모습의 사두(수행자)들도 웃으면서 피하니 이방인인 내가 인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샥티 아저씨가 운영하는 라가카페를 거점으로 바라나시 여행은 시작되었다.
라가카페는 음식값은 비싼 편이었지만 맛은 한국 음식점과 비슷했다.
그러나 비싼 음식을 먹으면서도 선생님이 E마트에서 구입해 이곳까지 힘들여 가져온 된장 고추장 라면을 생각하면 밥값이 비싸도 크게 아깝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오후에는 VHU(바라나시 흰두대학교)로 가서 대학과 박물관을 구경했다.
날씨가 너무 더워 짜증도 났지만 박물관 구경후 대학구내 흰두사원에서 예배드리는 모습도 보고 샥티 아저씨께 인도인들이 시바신을 섬기는 이유도 설명들었다.
시바신은 힌두교 주신으로 파괴와 재창조의 신인데 인도인들이 신봉하는 이유는
카스트제도 때문이라고 했다. 카스트 제도를 원망하면서도 다음 생에는 높은
카스트로 태어나게 해달라는 인도인들의 애뜻함이 담겨 있다는 설명이었다.
힌두교에서는 환생보다 영혼까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바라지만 그것이 안 되면 다시 태어날 때는 높은 계급의 카스트로 태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고 한다.
길가에서 갑자기 사고날 뻔했다. 내가 릭샤에서 내리는데 어떤 놈이 오토바이로
치고 가는 것이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피해서 별일 없었지만 어깨가 뻐근했다.
아픈 팔을 진정시킨 후 아시가트로 갔다.
가트란 갠지스강가에 세워진 목욕재단으로 강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말한다
아시가트옆 피자집에 들어가 피자를 시켜먹었다. 유명한 피자집인데 내가 기대했던 이탈리아안 피자 마르게리따와 다른 이상한 맛이었다.
이곳저곳 구경한 뒤 밤에는 6명의 부라만이 신께 드리는 의식을 구경했다.
여행 3일째의 밤이 깊어갔다 ....... 밤하늘에는 별이 반짝이고 ......
식민지 백성으로서의 아픔을 노래한 인도의 시인이 생각난다.
타고르 라빈드라나스 .......
“동방의 등불”
- 타고르 -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 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 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될지니.
마음에는 두려움이 없고
머리는 높이 쳐들린 곳
지식은 자유스럽고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는 곳
진실의 깊은 곳에서 말씀이 솟아나는 곳
끊임없는 노력이 완성을 향해 팔을 벌리는 곳
지성의 맑은 흐름이
굳어진 습관의 모래 벌판에 길 잃지 않는 곳
무한히 퍼져 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인도되는 곳
그러한 자유의 천국으로
내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
8월 14일 토요일
새벽 4시에 갠지스의 일출을 보려 했지만 비가 왔다.
애들을 깨우는 과정에서 시끄럽다고 옆방의 외국인에게 욕을 먹었다.
영어로 뭐라 말하는데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기분은 굉장히 나빴다.
오늘은 자유시간~ 선생님께 300루피를 받았다.
1루피를 대략 30원으로 보면 9천원을 받은 셈인데 보통 인도사람들이 하루에 2-30루피를 쓴다고 보면 엄청 큰 돈이었다.
이곳에 도착해서 아프던 머리가 점점 더 아프다. 물이 바뀐 탓인지 설사도 한다.
컨디션이 안 좋아 하루 종일 숙소에서 쉬고 근처를 거닐며 편안히 지냈다.
저녁에는 샥티 아저씨가 우리를 위해 특별히 2인조 전통악기 연주자를 불러 공연을 보여 주셨다. 그들이 연주한 악기중 자타르는 현악기로 굉장히 여성적이며 아름다운 소리가 났고 타블라는 타악기로 남성적 이미지가 강했다.
1시간동안 연주 후 같이 사진을 찍었는데 그들의 손은 온통 굳은살이었다.
거듭되는 공연으로 터지고 아프고 힘들어야만 만들어지는 그런 손이었다.
그토록 고생해야 이런 아름다운 소리가 나오는데.....
학교생활에 게으름만 쌓인 나의 나태함을 반성하며 선무도 수련에 정진하리라
다짐한다
이날 재미있는 광경이 있었다.
우리 방의 에어컨 실외기 아래쪽에 원숭이들이 비를 피해 앉아 있었다.
겁도 낫지만 귀여워 장난치고 싶었다.
그런데 2년전 일본인 여행자가 원숭이한테 물렸는데 그때 에이즈에 감염되어
죽었단다. 러니 원숭이가 무서울 수밖에 .....
원숭이 말고도 이곳 동물들은 피부병 등에 많이 걸려있었다.
장난치다 잘못 건드려 병이 옮기면 큰일이 아닌가......
8월 15일 일요일
오늘은 우리나라의 광복절이다.
1947년 영국에서 독립한 인도도 오늘이 우리와 같은 광복절인 셈이다.
년도는 달라도 다같이 뜻 깊은 날이다.
아침을 먹으러 홍콩서부터 동행한 신혼부부랑 한식을 먹으러 갔다.
나는 김치볶은밥을 시켜서 맛있게 먹었지만 친구들은 이상한 돈까스와 야채를 물에 넣고 삶은 듯한 밥이 나와서 조금밖에 먹지 못했다.
그 식당서 빈대누나도 만났다. 바라나시역에서 처음 만났었는데 빈대에 많이 물려있어서 그렇게 불렀다.그 누나의 말에 의하면 다른 호텔에서 한일간 주먹다툼까지 난일이 있었단다. 한국형들이 술 먹고 새벽에 일본사람들 숙소에서 문을 두드려 깨운뒤 “독도가 너의 땅이냐” 하면서 말싸움 하다가 주먹질까지 번졌단다.
빈대누나 못지않게 신혼부부도 왕빈대 중의 왕빈대였다.
선생님은 혹시 도움이 될까 해서 그들과 동행하기로 했는데 낯선 인도여행에서
황샘의 일방적인 도움만 받았으면서 짜기가 비할데 없었다.
아주 짠순이 짠돌이 신혼부부였다.
오늘 여행코스인 불교의 3대 성지 사르나트 사원으로 갔다.
불교의 3대 성지는 부처님 태어니신 룸비니, 부처님이 처음 설법하신 녹야원이
있는 르나뜨, 그리고 부처님이 열반하신 꾸쉬나가르이다.
사원에서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보리수나무 아래 떨어진 잎새를 주웠다.
너무도 유명한 보리수나무라서 잎을 따면 안된다고 한다.
날씨도 무지하게 더워 상현이랑 2루피를 내고 박물관에 들어갔다.
인도 화폐의 3마리 사자상(진퉁)이 정문 근처에 있어서 두루두루 구경했다.
저녁식사는 타지호텔 뷔페식당에서 했다. 이런 곳은 갑부들만 오는 곳이라 부유층사람들의 생활도 엿볼 수 있었다.
바라나시에서 5일째 밤이 깊어간다.
이곳은 한해 100만명의 순례객이 모여드는 힌두의 성지가 아니던가.
내 눈에는 흑탕물이 흐르는 강이지만 순례객들은 어머니의 강 갠지스에서 일출을 보며 경건한 마음으로 가트에서 목욕을 하고 사원에 참배를 한다.
삶과 죽음이 동시에 존재하는 곳. 부자는 많은 장작더미 속에서, 가난한 자는
한다발의 장작더미에 의지해서 매쾌한 냄새속에 육신을 불사르는 곳.
그들은 무슨 사연이 있기에 무엇을 잘못했기에 그토록 흐느끼듯 절규하듯 기도하는 걸까 바라나시는 언제까지나 영혼의 도시로 남이 있을 것인가..........
그들은 윤회를 믿는다. 시간은 1회성이 아니라 돌고 도는 것 따라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다른 시간의 시작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
영원히소멸하는 것 즉 해탈이다.
뼈를 태워 갠지스강에 띄움으로서 그들은 해탈에 이르렀다고 믿는단다.
8월 16일 월요일
오늘은 자유시간을 갖다가 오후에 아그라로 떠난다.
우연히 숙소 근처에서 광명 산다는 조은혜라는 누나를 만났다.
그 누나는 세계여행중인데 자기 동생에게 전해달라며 3KG의 홍차를 부탁했다.
나중에 만나면 스테이크정식 쏘기로 약속받고......
스테이크를 확실히 하고 돈도 없다기에 점심때 비빔밥을 사드린후 헤어졌다.
아그라행 침대열차는 4시30분 바라나시 역을 출발했다.
차창밖으로 인도의 시골풍경이 전개된다.
철길근처에 돼지가 돌아다니고 어떤 사람은 들에 앉아 실례를 하고 ......
사람이 사는 모습들은 어디서나 공통인 것 같다.
8월 17일 화요일
타지마할의 도시 아그라로 이동했다.
아그라 관광 후 버스로 야간에 푸쉬카르로 이동하는 일정이었다.
먼저 타지마할에 도착했다. 사잔티왕은 건축에 미친 왕이었다.
왕비 사후에 그리움으로 건축한 타지마할이지만 당시에는 국고가 바닥날 정도로
무모한 일이었다. 타지마할의 타지는 왕비의 이름이고 마할은 힌디어로 성이란
뜻이란다.
대리석으로 지었고 보석으로 장식된 건물이었다. 손으로 모든 작업을 했으며 통대리석을 깍아 밑판을 만든 후 거기에 조각하고 보석을 넣었단다.
대칭.....조화.....그당시 상상했던 이상향이 바로 타지마할로 표현된 것이다.
건물 내부 왕비의 묘는 꽃장식으로 화려했는데 죽음을 슬퍼하는듯 모두 고개를
떨구도록 장식되어 있었다.
세계7대 불가사의중 하나인 타지마할은 한국돈 2만원이상 입장료를 받을 정도로
훌륭한 관광상품이었다.
당시 내로라하던 조각가들이 몇십년간 공들여 타지마할을 완성했으나 사잔티왕은 후에 그 사람들의 손을 몽땅 잘랐다고 했다.
이런 위대한 건축물을 똑같이 만들어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사랑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던 기적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칭송받는 '타지마할', 누구나 한번쯤 TV나 사진을 통해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타지마할'이 탄생하게 된 아름다운 사연 또한 유명하다. 어쩌면 동화같은 역사때문에 '타지마할'이 더욱 유명해 졌을지도 모른다. 16세기부터 18세기 중반까지 인도를 통치했던 '무굴'제국. 이 제국의 전성기를 지배했던 5번째 왕 '샤자 한'과 그의 두 번째 왕비 '뭄타즈 마할'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뭄타즈 마할'은 '샤자 한'의 수많은 왕비중 가장 총애받은 왕비였지만 미모는 볼품 없는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지성과 애교, 밝은 성격은 '샤자 한'의 마음을 온통 흔들어 놓았다. 결국 '샤자 한'은 그녀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를 신임하였고 변방을 정벌하러 가는 길에도 그녀와 함께 갔을 정도였다. 그런 그녀가 너무 일찍 '샤자 한'을 떠나고 말았다. 14번째 아이를 낳다가 숨을 거둔후 '샤자 한'은 깊은 충격으로 하룻밤 사이에 머리가 백발이 되었을 정도였다. 그 후 '샤자 한'은 그녀의 마지막 소원대로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의 '타지마할'이다.
묘지건축에는 국가예산의 5분의 1이 투입되었다. '아지메르' 지방의 최고급 대리석들이 속속 '아그라' 성으로 도착하였고 인도전역 최고의 조각가와 세계각지의 건축가들이 초빙되었다. 대리석을 비롯해 루비, 사파이어, 옥 등이 중국과 아라비아 등지에서 대량 수입되었다. 2만명의 노예들이 동원되어 무려 22년간에 걸쳐 진행되는 대공사가 시작되었다. 아름다운 '타지 마할'이 완공된 후 '샤자 한'은 다시는 같은 건물을 지을 수 없도록 수많은 장인들의 손목을 잘랐 다고 한다. 그러나 '샤자 한'의 이런 지나친 사랑은 결국 그의 인생과 나라까지 불행하게 만들고 말았다. 30년간 전성기를 누렸던 '무굴'제국은 무리한 건설로 국고가 바닥나게 되었고 '샤자 한'은 결국 자신의 셋째 아들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아그라' 성의 조그만 방에 갇혀 8년간의 세월을 보내다 쓸쓸한 최후를 맞았다. 그리고 자신이 너무나 사랑한 여인 '뭄타즈 마할' 옆에 안치되었다.
신조차 부러워한 완벽한 아름다움의 결정체
'타지마할'의 규모는 가로, 세로 57m, 높이 76m로 중앙 돔 직경이 17.7m로 되어 있다. '무굴' 제국 수도인 '아그라'에 지어진 '타지마할'은 완성도와 완벽함이 현재의 전문가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라 한다. 수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색조와 자태는 한결같고 매년 우기때마다 범람하는 '야무 나'강(갠지스강) 옆에 있어도 한번도 침수된 적이 없을 정도로 과학적인 건축물로 유명하다. 또 건축의 비례미와 돔이나 아치의 수려한 곡선의 조화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에 충분하다.
처음 이곳을 방문하는 여행객들은 붉은 사암으로 된 정문에 들어서자마자 탄성을 지른다. 넓은 마당에 수로가 펼쳐지고 정원과 분수가 알맞게 꾸며져 있다. 그 낙원 뒤로 '타지마할'이 우뚝 솟아있는데 수로에 비친 '타지마할'과 이어져 보이는 모습이 마치 자신의 모습에 반해 평생 물만 쳐다보았던 그리스 신화의 '나르키소스'를 보는듯 하다. 능묘를 둘러싼 첨탑과의 균형미, 전면에 펼쳐진 화원에서 품어져 나오는 꽃향기등이 이곳에 들어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첫사랑이 주는 설레임처럼 두근거리게 한다. 어떤 방향에서도 균형잡힌 완벽한 모습을 자랑하고 시간에 따라 변하는 마술적인 자태, 코란을 새겨넣은 대리석 기둥의 시각적인 대칭의 정교함등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또 건축의 균형을 위해 본관의 한쪽 옆에 모스크를 만들고 반대쪽에도 똑같은 건물을 세운 치밀함과 대리석 하나 하나를 깎아 만든 정교함에 이르기까지 완벽 그 자체이다. '타지마할' 내부에 들어설 때는 반드시 신발을 벗어야 하는데 인도의 어느 사원이든 신을 벗어야 하는 풍습 때문이다. 내부에 들어서면 갖가지 색깔의 대리석으로 온통 도배가 되어 있고 대리석 에 무늬를 파고 다시 청옥, 루비 등으로 상감을 하여 메우는 기법이 사용된 대리석도 볼 수 있다. 또하나 놀라운 것은 이곳 내부는 바깥 날씨에 상관없이 항상 22∼24도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타지마할'의 가장 아름다운 자태를 꼽으라면 사람들은 단연 보름달빛이 비출 때라고 할 것이다. 달빛을 받아 하얗게 반짝이는 타지마할은 마치 봄날에 소담스럽게 핀 목련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새벽녘 동이 틀때 비치는 '타지마할'은 남자의 사랑을 받은 여자의 볼처럼 발그스름해 지면서 또다른 그림을 연출한다. '타지마할'의 전경을 한눈에 감상하기에 좋은 곳으로 '아그라' 성안의 8각탑을 빼놓을 수 없다. 이곳은 공교롭게도 '샤자 한'이 8년 동안 갇혀있다 세상을 하직한 곳이기도 하다. 창문밖으로 손에 잡히지 않는 '타지마할'을 바라보며 마지막을 보내야 했던 '샤자 한'의 슬픈사랑 이 이곳에 서려 있다. 지나친 사랑의 집착으로 결국 모든 것은 잃어야 했던 '샤자 한' 사랑때문에 행복했고 사랑때문에 불행해야 했던 그의 마지막은 결국 '타지마할'로 부활되어 영원 히 사람들의 마음속에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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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지마할에서 7분 거리에 있는 아그라포트로 이동했다.
사잔티왕 전에 지어진 요새인데 왕궁으로 재건축 되어졌다고 한다.
수압을 이용하여 만든 분수와....분수의 시원한 물을 이용하여 만든 자연에어컨....화려한 대리석 조각....거울같은 유리를 이용하여 초 하나만 켜도 밝아지는 궁전....
아름다운 건물이건만 사잔티왕은 이곳에서 타지마할을 바라보며 쓸쓸이 죽어갔다.
사랑에 눈먼 왕이 있었기에 세상의 역사는 다시 변화되며 지금은 인도 관광수입의 많은 부분을 담당하는 관광지가 되었으니 ^^..^^ !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며 돌아온 우리들은 샤워후 저녁을 먹고 푸쉬카르행 침대버스에 올라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8월 18일 수요일
자이살메르라는 도시에서 지붕이 있는 버스로 갈아탄 뒤 40분쯤 달려서 조그만
호수도시 푸쉬카르에 도착했다.
호수를 가운데 끼고 빙 둘러서 집이 있는 마을로 쇼핑의 천국이었다.
다양한 음식과 값싼 옷, 크리스탈, 각종 무기까지 있으니 게임이나 소설 속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었다.
동물도 다양하여 돼지, 개, 소, 원숭이 등등 모든 것들이 인간과 같이 생활한다.
인도는 정말 신기하고 흥미로운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
이곳에서도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스스로 알아서 여행하라는 샘의 배려였다.
PC방에 가서 멜도 남기고 쇼핑도 했다. 친구들은 헤나걸들에게 걸렸다가 간신히
빠져 왔다. 악수하는 척하다 헤나를 손에 그리고 600루피를 요구했다.
다행이 45루피를 주고 해결했다.
나는 옷을 사려고 흥정하는데 장당 110루피 달라는 것을 3벌에 200루피까지 깍았다가 안사니까 다시는 오지 말라며 내�i았다.
낙타사파리는 2시간 타는 건데 정말 재미있었다.
나의 낙타몰이꾼은 12살 꼬마였는데 한국말 몇 마디는 할줄 알았다.
병욱이의 낙타가 제일 예뻤는데 낙타이름은 원빈, 몰이꾼 이름은 디카프리오라나...... 나도 이름을 말했다. 마이네임 오늘내로 빛갚으리오!”
만나서 반가워...ㅎㅎㅎ...
쉬는 시간에 갑작스럽게 많은 비가 내렸다.
내 우의는 판쵸로 엄청 컸는데 그걸 펼쳐 나무막대로 받쳐 그 안에 구경 온 아이들을 대피 시켰다.
캠프파이어 준비를 하는데 집시 애들이 있었다
“어라 근데 이 집시들 아까 헤나걸들 아니야?” 맞았다
낮에 본 헤나걸.... 아이들은 싫은 표정이었다. 춤도 똑같았는데 춤추고 싶은 표정이 아니었다.떠돌아다니는 집시들의 생활이 안쓰럽게 생각되었다.
그들이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어디든 정착을 해야 할텐데....
8월 19일 목요일
오늘 자유시간에 푸쉬카르 온동네를 돌아다녔다.
어제의 집시들과 마주쳤으나 그냥 지나가며 그들의 헤나사업에만 열중이었다.
환전하러 환전소에 들어갔는데 동네 애들이 몰려다니며 보석을 샀다.
장난삼아 만원짜리 지페를 교환원에게 보여 주었다.
한국돈을 처음 보았는지 그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아이 1 : “이츠 달러?”
아이 2 : “오케이, 달러”
아이 1 : “하우머치?”
아이 2 : “원밀리언즈”
아이 1 : “유에스 달러?”
아이 2 : “오케이”
우리나라 돈을 미국달러로 착각한 것 같았다. 10달러로 4일을 배불리 먹고 산다는데 만달러라... 아무튼 그들은 조용히 사라졌다.
그들을 놀려 준것이 재미있었다 .
우리나라 돈은 가치가 적었다. 빨리 힘을 키워야 되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점심에 50루피(약 1,500원)짜리 뷔페에 갔는데 주메뉴보다 부메뉴를 많이 먹었다.
감자튀김은 무한리필에 정말 맛있었다.
힐링스톤도 사고 목걸이도 사고 즐거운 하루였다.
8월 20일 금요일
오전에 자유시간을 갖고 오후에 다시 델리로 돌아간다.
시내를 구경하러 나갔다가 이상한 장면을 목격했다.
오토릭샤꾼이 실수로 승용차를 받았는데 승용차 운전자가 차에서 내려 릭샤꾼을
사정없이 때리고 있었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옆에서 구경하던 교통경찰이 같이 거들며 릭샤꾼을 때린다는 사실이다. 반항한번 못하고 잘못했다고 싹싹 빌며 얻어맞는 릭샤꾼이 불쌍했다. 그러나 이런 모습들을 여기서는 어느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릭샤꾼은 카스트제도의 하층민에 속하는 모양이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봉건지주에 반발하는 시민혁명으로 근대사회가 성립되었고 그렇지 못한 나라들도 다양한 형태의 시민계급이 투쟁을 통하여 그들의 권리를 획득했는데 아직도 인도가 계급제도라는 과거의 유산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발전을 더디게 하는 것은 아닐까?
부자는 많은 장작더미 속에서, 가난한자 빈약한 장작더미 속에서 태워져 한줌 재로 성스러운 갠지스강에 뿌려진들 그들의 영혼이 구원에 이를 수 있겠는가.
화장의식이 끝나기가 무섭게 타다 남은 장작을 하나라도 더 줍기 위해 경쟁하는 가난한 인도인의 고단한 삶을 힌두교에서 말하는 운명과 인과응보라는 말로 덮어 버릴 수 있을까? 그러나 그런 걱정은 나의 생각일 따름이다.
아직까지 인도인들 스스로는 차별과 가난에 대하여 반발하고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들의 얼굴에는 늘 미소가 가득한데 달리 보는 내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특급열차 1등석에 탔는데 2시간에 한번씩 과자와 음료수를 주었다.
6시간 30분 동안 달린 기차는 우리를 밤 10시30분에 델리역에 내려주었다.
지난번에 머물렀던 디센트호텔에 다시 투숙했다.
8월 21일 토요일
아침식사는 한식 도깨비식당에서 돈육볶음밥을 맛있게 먹고 PC방에서 드라마 까지 보았다. 인도에서 한국의 드라마를 보았으니 인터넷의 위력이 대단하다.
훈조는 열병으로 엄청 아파 보였다 식은땀이 많이 나는데도 훈조와 게임기 가게에 갔다. PS2 콘솔은 우리나라의 반값이었다.
훈조를 숙소로 데려다 놓고 나는 인도에 딱 1곳이라는 맥도날드에 갔다.
그곳은 값도 비싼 편이고 오토릭샤꾼이나 싸이클릭샤 왈라 들은 절대 들어올 수
없었다.입구에는 2명의 경비원이 정중히 인사하며 문을 열어주었다.
그런데 나에게 시선이 몽땅 쏠렸다. 사람들이 신기한듯 나를 쳐다보았고 주방에서 일하던 사람까지 나와서 바라보았다. 그들 눈에는 내가 신기한 외국인으로 보였던
것이다.
셋트메뉴를 선택하여 후다닥 먹고 나왔다. 왕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저녁은 선생님이 고급식당서 쏘셨다. 보경이 생일축하를 겸해서 탄도리 치킨,
죽순요리, 야채튀김등 엄청 맛있었는데 웬걸 설사병이 나버렸다.
뱃속이 놀랜 모양이다.
8월 22일 일요일
인도여행 11일이 지났고 벌써 집에 갈 시간이다. 짐을 꾸리는데 친구들은 목걸이, 보석 등 구입한 선물이 많았다. 인도는 특히 보석이 싸고 유명했다.
그동안 많은 도움을 준 샥티 아저씨께 고맙고 감사한 마음으로 작별인사를 했다.
10억의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곳. 많은 인구만큼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는 인도.
비록 짧은 기간의 여행이었지만 떠나는 순간까지도 인도를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정리가 안 된다. 하여튼 인도항공의 비행기는 이륙하고 창밖으로 드넓은 평야가 펼쳐진다.
<나마스테 인디아>
홍콩서 19시간 기다려야 했지만 훈조가 열감지기에 체크되어 병원진단을 받는 바람에 4시간 만에 대한항공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다행히 공항내 병원에서는 NO Problem 이란다.
덕분에 우리는 12시간이나 빠른 비행기를 타고 새벽에 한국에 올 수 있었다.
함께 여행한 친구들이 고맙고 고생만 시킨 선생님께 너무너무 죄송하다.
인천공항에 어머니께서 김밥을 준비해 나오셨으나 우리들 모두가 설사병으로 김밥을 먹을 수 없었다. 목적지를 향하여 공항에서 각자 헤어졌다.
같이 여행한 훈조 병욱 보경 상협 상현 원희 현민 샥티 아저씨 신혼부부 그리고
황인랑 생님과 함께한 시간들을 오래오래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싶다.
얻어맞으며 싹싹 빌기만 할뿐 군소리 없던 릭샤왈라가 자꾸만 생각난다.
전날 한바탕 싸우고도 다음날 만나서는 아무일 없었던 것처럼 반갑게 웃으며 인사하던 호텔직원이 생각난다.
아무런 불평이나 불만이 없어 보이는 인도인들이 눈에 아른거린다.
인연이 된다면 다시 찾고 싶다 인도를......^-^......
나마스떼.......